수박 한 통이 쌀 다섯 가마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세종 23년(1441년)에는 수박 한 통이 쌀 다섯 가마라고 기록되어 있다. 쌀 값이 저렴한 지금에도 뉴스에 나올 일이다. 하물며 지금과 비교도 안될 만큼 귀했던 조선 초기임을 감안하면, 수박 한 통이 거의 금덩어리 수준이었다는 소리다. 우리나라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성군으로 꼽히는 세종대왕이지만, 수박 도둑에 대해서만큼은 대노했다고 한다. 세종 5년인 1423년, 궁궐 주방을 담당하는 내시 하나가 수박 한 통을 훔치다 들켰는데, 그 결과 장형 100대에 경상도 영해로 유배되는 벌을 받았다고 한다. 금덩어리 수준의 수박을 훔쳤으니, 아무리 어진 임금이었던 세종이라도 참기 힘들었던 모양이다.
조선시대 양반 과일의 대표였던 수박
세종 사례 이외에, 옛사람들이 남긴 각종 시와 문헌에도 수박에 대한 예찬을 찾을 수 있다. 고려 말의 대학자이자 충신이었던 목은 이색이 남긴 시에 나오는 수박이다. 그가 천수사라는 절에서 수박을 맛보고는 "의왕(부처)의 빈 땅에 수박을 심어 가꾸니 맛은 단 샘물 같고 빛깔은 눈꽃 같다"라고 했다. 그런데 이 천수사라는 절은 보통 사찰이 아니었다. 지금은 사라졌지만, 목은 이색과 최영 장군, 조선 태조 이성계 등 고려 말의 왕과 재상, 조선 초기의 임금과 고관대작들이 수시로 드나들며 연회를 열고 각종 행사를 개최했던 유명한 절이었다. 그만큼 부유했던 절이었고, 이때 수박의 각종 불사에 공양물로 쓰였던 과일인 동시에 절을 찾는 고위층을 대접하는 특별한 과일이었다. 또한 성종 때 사람이었던 김종직은 수박 네 덩어리를 얻고는 즉시 경상감영이 있는 상주로 올려 보냈다고 한다. 그만큼 소중한 과일이라는 의미였다. 수박은 이렇게 일반인은 쉽게 먹지 못하는 상류층의 과일이었다. 그런 만큼 농민한테는 어려움을 안겨주었다. 농민들이 수박을 심지 않는 이유가 아전들이 수시로 시비를 걸어 수박을 빼앗기 때문이었고, 그것을 보면 수박은 여전히 값비싼 고급 과일이었던 것이다. 20세기 초인 1930년대까지만 해도 참외는 평민 과일, 수박은 양반 과일이라고 했으니, 그만큼 수확량도 많지 않았을 것이다.
사막 과일이었던 수박이 전 세계로 퍼지다
수박의 원산지는 고대의 서부 아프리카로 추정된다. 기록에 따르면 옛날 수박은 지금의 익지 않은 수박처럼 허옇거나 희미한 노란색이 일반적이었다. 이렇게 옛날 수박이 지금과 딴판이었지만, 그렇다고 모든 것이 달랐던 것은 아니었다. 5,000년 전부터 지금까지 본질적으로 달라지지 않은 것이 하나 있는데, 수분이 많아서 먹으면 시원한 청량감이 느껴진다는 것이다. 이야말로 수박이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많은 사람들로부터 사랑받으며 지금의 모습으로 진화한 근본적인 이유일 것이다. 야생 수박 중에서 수분이 많고 맛도 괜찮은 우수한 종자를 골라 심어가면서 품종을 개량해 식용 열매로 재배한 것은 고대 이집트인들이었다. 음식사학자와 이집트 학자들은 투탕카멘의 피라미드에서 발견된 수박이 과일의 용도가 아닌 물 대신 마실 음료 대용이었을 것으로 해석한다. 파라오가 사후세계로 돌아가는 멀고 먼 여정에서 혹시 목이 마를 때 갈증을 해소해 줄 음료였다는 것이다. 실제 야생 수박은 물이 잘 빠지는 건조한 모래땅에서도 잘 자라는 과일로, 수분이 약 90%인 덕에 비가 오지 않는 건기에도 몇 달 동안 수분을 유지할 수 있다고 한다. 그렇기에 사막지대 주민이나 여행자에게는 필수 휴대 과일이었다. 물을 대신하던 수박을 과일 및 채소 등의 다양한 용도로 영역을 넓힌 사람들은 그리스&로마인들이었다. 그리스 사람들은 약품으로도 활용을 했고, 히포크라테스를 비롯한 그리스 의사들은 수박을 이뇨제로 처방했고 뜨거운 햇빛으로 일사병에 걸렸을 때 수박껍질을 머리 위에 올려놓아 열을 식히는 데 사용했다. 아프리카의 야생에서 자라는 물 많은 열매에서 그리스 로마 중동을 거치면서 채소로, 과일로 조금씩 진화하기 시작했다. 7세기에 인도로, 10세기에 중국으로, 13세기에는 유럽에 전해졌다. 같은 시기에 몽골의 원나라가 고려에 종자를 퍼뜨렸으니, 수박이 우리 입으로 들어오기까지는 진화의 역사만큼이나 전파경로 역시 길고 멀었다.
미국에서는 인종차별의 상징물인 수박
물이 부족한 곳에서 대개 수박은 귀한 과일이었지만, 수박이 어느 곳에서나 환영받았던 것은 아니다. 미국에서 수박의 위상은 동양이나 중동과는 달랐다. 미국에서 수박을 먹거나 수박을 선물하거나 주고받을 때는 조심할 필요가 있다. 미국에서 수박은 한때 흑인을 멸시하고 비하하는 도구, 인종차별을 상징하는 과일이었다. 아직도 흑인들은 수박 때문에 불쾌감을 느낄 수 있고 또 수박으로 흑인을 조롱하는 경우도 있으니 조심해야 한다. 수박이 언제부터 흑인을 멸시하고 조롱하는 상징적인 과일이 됐는지 이유는 분명치 않다. 하지만 간접적으로 수박의 미국전파과정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짐작되고, 직접적으로는 미국 남북전쟁과 그에 따른 노예해방이 계기가 된 것으로 본다. 18세기에 미국에 수박이 널리 퍼졌다. 남부에서 흑인 노예를 이용한 대규모 농업이 시작되면서 수박을 많이 심었는데, 이때 흑인들이 수박을 열광적으로 좋아했다고 한다. 뜨거운 땡볕에서 일할 때 수박 한 덩이로 타는 목마름을 달래고 더위도 식히며 허기도 채울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때부터 남부 백인들 사이에서는 수박은 흑인 노예들이 좋아하는 과일이라는 편견이 생겼다. 그러던 중 북군이 남북전쟁에 승리하면서 노예해방이 이뤄졌는데 이때 해방된 노예들이 수박을 재배해 판매하면서 돈을 벌었고, 그러면서 수박을 자유의 상징으로 삼았다. 노예해방 전부터 남부의 몇몇 노예주들은 흑인 노예들이 수박을 재배해 먹고 파는 것을 허용했는데 이것 역시 일부 백인들에게는 꼴 보기 싫었을 것이다. 이는 20세기 초까지도 이어졌다. 미국 남부의 일부 인종차별주의자들이 프라이드치킨과 땅콩을 흑인들이 먹는 음식이라며 먹지 않았던 것처럼, 수박 역시 흑인들의 과일이라며 기피했다고 하니, 수박에 얽힌 어두운 역사가 여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