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대 중국을 사로잡은 고급 과일의 위상
옛날에는 포도가 단순한 과일이 아니었다. 동서양에 따라 차이는 있었지만 어쨌든 과일 그 이상의 의미가 있었다. 무엇보다 고대 서양에서 포도는 국부의 원천이었다. 따지고 보면 메소포타미아에서 서양 문명이 시작된 이후 로마시대에 이르기까지 지중해를 둘러싸고 펼쳐진 고대 서양세계에서는 포도밭을 차지한 나라가 그 지역의 패권국가였다. 먼저 동양의 포도다. 포도의 원산지는 지금의 흑해 부근 코카서스 지방과 터키 일대인 소아시아, 미노르 지역이다. 이곳에서 서쪽으로는 순차적으로 이집트, 그리스, 로마 그리고 유럽으로 퍼졌고 동쪽으로는 서역인 중앙아시아를 거쳐 중국, 한국, 일본으로 전해졌다. 2,200년 전 중국은 아직 쌀이나 말이 전해지기 이전이다. 그렇기에 상류층도 기장이나 귀리, 수수 등의 잡곡을 먹었고 밀은 황제를 비롯한 최고위층이 특별한 날, 제물로 바치고 난 후 먹는 곡식이었다. 포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때의 포도는 곡식으로 빚는 술보다 더 질 좋은 포도주를 빚는 원료인 데다가 술은 제물로 쓰거나 권력층의 연회 음식에 쓰이는 고부가가치 음료였다. 고대에는 술이 귀했다. 사람 먹기에도 부족한 곡식을 발효시켜야만 만들 수 있었는데 이렇게 힘들게 얻는 술도 자칫 잘못하면 쉬어 상하기 일쑤였다. 그런데 포도로는 곡식보다도 많은 양의 포도주를 얻을 수 있을 뿐 아니라 10년이 지나도 쉬지 않고 맛이 더 좋아졌다. 그렇기에 포도가 퍼지기 전의 고대 중국에서 포도주는 값비싼 보물과도 같았고, 포도주를 천석, 만석 쌓아놓고 마시는 서역을 선망의 눈으로 바라봐왔던 것이다. 포도가 귀했던 시기는 꽤 오래되었다. 포도가 처음 전해진 기원전 2세기부터 실크로드가 활짝 열린 8~9세기 당나라 때까지, 포도는 약 1,000년 동안 귀족도 마음껏 먹지 못한 사치스러운 과일이다. 당 고조 이연의 신하 중에 진숙달이라는 인물이 있었다. 고조가 포도를 하사했는데 먹지를 않았다. 까닭을 묻자 어머니가 조갈증이 있어 포도를 구하려 했지만 구할 수 없으니 이 포도를 어머니께 드리려 한다고 대답했다. 이 말을 듣고 황제가 감동해 큰 선물을 내렸다느 이야기가 있다. 당이 망한 후 들어선 후한의 장수, 맹타가 포도주 한 말을 바치고 양주 자사의 벼슬을 얻었다는 기록도 있다. 10세기 무렵이니 이때까지도 중국에서 포도와 포도주가 뇌물로 쓰였던 셈이다.
포도 먹고 병을 치료한 조선의 왕들
포도가 귀한 것은 우리도 예외가 아니었다. 산포도라고 불린 머루는 예로부터 한반도에 자생했지만, 외래 과일인 포도는 구하기가 쉽지 않았기 때문에 보물 취급을 받았다. 한반도의 포도 전래 시기는 확실치 않은데 14세기 후반인 고려 말이다. 이보다 약 150년 전인 13세기 초, 고려 시인 이규보의 글에도 포도가 보이기는 한다. 먹으로 대나무를 그렸는데 솜씨가 부끄러워 포도나무 가지를 지웠다는 내용이다. 다만 진짜 포도를 재배해 그 가지를 사용한 것인지 그저 시적 표현에 불과한 것인지는 분명치 않다. 포도 재배의 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포도주는 13세기 후반에 고려에 전해졌다. 조선 초에는 임금도 포도 먹기가 쉽지 않았다. 태조 7년 음력 9월 1일의 기록에 태조가 오랫동안 병이 낫지 않아 수정포도가 먹고 싶다고 하자, 왕자들이 널리 포도를 구했는데 한 신하가 포도 대신 서리 맞아 반쯤 익은 산포도 한 바구니를 바치니 임금이 크게 기뻐했다는 기록이 보인다. 이어 이틀 후 기록에는 산포도를 바친 신하에게 쌀 열 가마를 하사했다는 기록과 함께 태조가 목이 마를 때마다 한두 알을 맛보니 병이 회복돼었다는 내용이 보인다. 꿩 대신 닭으로 먹은 산포도였지만 포도가 소갈병으로 당이 떨어졌을 때 이를 보충하는 약으로 쓰였음을 알 수 있고, 포상금 성격이 강하지만 쌀 열 가마를 받았으니 포도의 값어치가 엄청 낫음을 짐작할 수 있다. 참고로 조선시대 기록에는 여러 포도 종류가 보이는데 수정포도는 포도 알이 수정처럼 맑고 하얗기에 생긴 이름이라니 아마 청포도 종류가 아닐까 짐작된다. 마유포도는 알이 말 젖처럼 긴 모양을 뜻하고, 서양 품종이라는 쇄쇄포도는 작은 포도 이 송이송이 달린 품종이다.
포도밭, 로마제국의 핵심 산업
고대 서양인에게 포도는 어떤 과일일까? 로마시대 이후 서양은 포도를 동양처럼 애지중지 하지는 않았다. 포도가 흔했기 때문이다. 누구나 포도를 먹고 와인을 마실 수 있을 만큼 지중해 세계, 그리고 유럽에 널리 퍼졌다. 그 전파의 주역은 기원전 2세기에서 서기 3세기까지의 로마제국이었다. 로마시대에 포도가 흔했다고 하여 서양에서 포도가 갖는 의미를 과소평가해서는 안된다. 고급 과일로 포도 알 하나하나를 소중히 여겼던 동양과 달리 서양에서 포도는 생활필수품이었고, 포도를 재배하는 포도밭과 포도 관련 제조업은 국가 기간산업이었기 때문이다. 포도는 와인을 만드는 연료이고, 와인은 술이 아닌 물과 혼합해 마시는 현대의 생수 같은 음료였다. 게다가 와인 제조 후 남은 찌꺼기로 도로 포장재, 페인트와 같은 도장재 등을 만들었다. 그렇기에 포도밭은 곧 국가경제였고 포도 재배지역을 차지했다는 것은 당시 세계의 패권을 차지했다는 이야기가 된다. 와인이 맥주보다 고급인 이유는 포도는 밀이 보리에 비해 재배지역이 제한된다. 또 곡식을 저장했다가 필요하면 술을 빚을 수 있는 맥주와 달리 와인은 포도 수확철에만 빚는다. 그만큼 희소가치가 높다. 고대의 술은 부가가치가 높은 상품이었기에 값비싼 술인 와인 제조능력을 갖췄다는 것은 핵심 기술을 확보해 산업을 발전시켰다는 의미가 된다. 로마제구이 포에니 전쟁에서 카르타고를 물리친 것은 숙적 한니발 장군을 굴복시켰다는 군사적 승리 이상의 의미가 있었다. 로마제국이 페니키아 상인으로부터 지중해의 무역권을 넘겨받아 경제적 부를 쌓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와인으로 국한시켜 봐도 지중해 일대의 포도 재배지역이 로마제국의 손에 들어왔음은 물론, 당시 최첨단 기술인 와인 양조기술을 확보했다는 의미가 있다. 카르타고를 멸망시킨 로마는 재기가 불가능하게 도시 전체를 갈아엎고 소금을 뿌려 황무지로 만들어 버렸다. 다만 세계 최고 수준이었던 포도 재배법과 양조 기술 등 카르타고의 농업기술은 철저하게 흡수했다. 이렇게 로마제국이 지중해의 패권을 차지하게 되면서 로마에서는 와인 황금시대가 열리기 시작했다.
폼페이 최후의 날 이후 벌어진 포도 파동
로마에서 와인은 단순히 쾌락을 위해 마시는 기호식품이 아니었다. 당시 사람들은 와인에 물을 타서 생수처럼 마셨다. 일종의 정화제 내지는 정수기였던 것이다. 와인과 포도가 로마제국 경제에서 얼마나 중요한 비중을 차지했는지는 폼페이가 화산폭발로 파묻히게 됐을 때의 상황에서 짐작할 수 있다. 서기 79년 8월 24일 나폴리 남쪽 베수비오 화산이 폭발하면서 쏟아져 내린 화산재가 폼페이를 덮쳤다. 약 2,000명의 시민이 목숨을 잃었고 로마 상류층의 휴양지이며 농업과 상업 중심지였던 폼페이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이것이 폼페이 최후의 날이다. 그 결과 폼페이 인근 나폴리에서 약 220km 떨어진 로마 시민들이 패닉에 빠졌다. 폼페이 주민의 죽음이나 화산폭발에 대한 공포 때문이 아니 와인이 부족해졌기 때문이다. 와인 값이 폭등했고 로마 시내에서 와인 사재기가 벌어졌다. 당시 폼페이는 로마의 배후 산업도시로, 와인 공급 기지 중 하나이자 와인용 포도의 중요 재배 지역이었다. 그래서 술의 신, 박카스를 도시의 신으로 받들정도 였다. 먼저 폼페이가 화산재에 묻히면서 로마와 이탈리아 각지에서는 폼페이에서 공급하던 와인을 대체하기 위해 앞다투어 포도를 심기 시작했다. 세월이 흘러 포도를 수확할 무렵이 되자 포도 공급 과잉으로 와인 값이 폭락했다. 1세기 후반 로마의 풍자시인 마르티알리스는 한 시에서 와인이 물보다 더 싸졌다고 언급했을 정도다. 그리하여 서기 92년, 급기야 당시 황제였던 도미티아누스가 포도 재배를 억제하는 칙령을 발표했다. 도미티아누스 칙령은 서기 280년까지 188년 동안 지속되다가 로마 제국 41대 황제인 프로부스 황제에 의해 폐기된다. 프로부스 황제가 적극적으로 포도밭 확대를 한 이유는 일종의 농지 개척을 통해 로마군단과 이주민에 대한 일자리 창출을 위함이다. 그리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야만인에게 문명화된 음료인 와인을 제공함으로써 그리스 로마의 문명세계로 이끌려는 목적도 있었다.
포도 한 송이는 수백 개의 꽃이 모여 만들어진다
우리가 먹는 포도 한 송이는 사실 수백 개의 작은 꽃들이 모여 만들어진 결과물이다. 포도나무가 꽃을 피우면 작은 꽃들이 촘촘하게 붙어 있는데, 이 꽃들이 수정 과정을 거쳐 점차 알이 굵어지면서 우리가 아는 포도알이 된다. 특히, 포도나무의 꽃은 크기가 작고 눈에 잘 띄지 않지만, 향기가 좋아 벌과 곤충들을 끌어들이며 자연스럽게 수정이 이루어진다. 하지만 모든 꽃이 포도알로 변하는 것은 아니며, 수정되지 않은 꽃은 자연스럽게 떨어지고, 남은 것들만 자라서 우리가 먹는 포도가 된다. 또한, 포도 재배 과정에서 농부들은 적절한 크기와 맛을 유지하기 위해 꽃이 피고 난 후 불필요한 포도알을 솎아내는 '적과 작업'을 진행하기도 한다. 이렇게 작은 꽃들이 모여 우리가 즐겨 먹는 포도 한 송이를 이루며, 한 송이의 포도 안에는 자연의 정교한 생명 과정이 담겨 있는 것이다.
포도는 오래될 수록 더 단맛이 강해진다
포도는 시간이 지나면서 수분이 증발하고 당도가 농축되기 때문에, 오래될수록 더욱 달콤한 맛이 강해지는 특징이 있다. 특히 냉장 보관을 하지 않고 자연 건조 상태로 두면 수분이 빠져나가면서 당 성분이 더 응축되어 맛이 강해지며ㅡ 결과적으로 건포도가 만들어진다. 건포도는 생포도보다 당도가 4배 이상 높아지고, 포도 껍질 속의 항산화 성분도 더 농축되어 건강에 어둑 좋은 효과를 나타낸다. 또한, 일부 포도 품종은 수확 후 일정 기간 숙성시키면 더 깊은 풍미를 가지게 되며, 와인을 만들 때도 포도를 발효시켜 자연스럽게 당도를 높이는 과정을 거친다. 이러한 특징 때문에 포도는 단순히 신선할 때만 먹는 것이 아니라, 말리거나 숙성시켜 더욱 깊고 진한 맛을 즐길 수 있는 과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포도를 보관할 때 너무 신선한 상태만을 고집하기보다, 일부러 숙성시켜 다양한 맛을 경험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